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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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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차시 1세는 1443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1458년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한 인물이다. 르네상스 문화를 진흥하고,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과 군사 개혁을 통해 헝가리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헝가리의 독립을 지키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사후 헝가리는 다시 혼란에 빠졌으며, '정의로운 마차시'라는 칭송과 함께 대중적인 민담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세 번 결혼했으나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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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시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안드레아 만테냐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헝가리 왕 초상화
안드레아 만테냐의 초상화
헝가리어후냐디 마차시
루마니아어마티아/마테이 코르빈
크로아티아어마티야/마티야시 코르빈
슬로바키아어마테이 코르빈
체코어마티아시 코르빈
통치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왕재위 기간: 1458년 1월 24일 – 1490년 4월 6일
대관식: 1464년 3월 29일
선임자: 라디슬라우스 5세
후임자: 블라디슬라스 2세
섭정: 미하이 실라지(1458년)
보헤미아 왕재위 기간: 1469년–1490년
선임자: 이르지
후임자: 블라디슬라스 2세
참고: 이르지와 블라디슬라스 2세에 의해 이의 제기됨
오스트리아 대공재위 기간: 1487년–1490년
선임자: 프리드리히 5세
후임자: 프리드리히 5세
참고: 프리드리히 5세에 의해 이의 제기됨
개인 정보
배우자엘리자베트 (1455년 결혼, 1455년 사망)
카테지나 (1463년 결혼, 1464년 사망)
베아트리체 (1475년 결혼)
자녀야노시 코르비누스(사생아)
가문후냐디 가문
아버지후냐디 야노시
어머니엘리자베트 실라지
출생일1443년 2월 23일
출생 장소헝가리 왕국 콜로주바르 (현재의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
사망일1490년 4월 6일
사망 장소오스트리아,
매장 장소왕립 대성당, 세케슈페헤르바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서명

2. 생애

1443년 2월 23일 헝가리 콜로주바르(Kolozsvárhu, 현재의 루마니아 클루지나포카)에서 후녀디 야노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헝가리 왕국의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중세 헝가리의 전성기를 마련했다. 대외적으로는 오스만 제국, 보헤미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맞서 헝가리 왕국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마차시 코르빈이 태어난 클로즈부르크(현재의 클루지-나포카, 루마니아)의 마차시 코르빈 하우스


젊은 군주로서의 마차시 코르빈. 스포르차 성, 이탈리아 밀라노 박물관


1456년 아버지 야노시가 페스트로 사망하였고, 1458년 17세의 나이로 헝가리 왕에 즉위하였다. 1469년에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1476년에는 나폴리 왕국의 페르디난도 1세의 딸인 베아트리체 다라고나와 결혼했다. 1479년 올로모우츠에서 체결된 보헤미아와 헝가리 양국 간의 평화 조약에 따라 실레시아, 모라바, 루사티아를 획득했다. 1485년에는 오스트리아 을 점령했고, 1487년에는 오스트리아 공국의 대공에 즉위했다. 1490년 4월 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헝가리 세케슈페헤르바르 성당에 안치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이탈리아르네상스 문화를 수용했고 포조니(Pozsonyhu, 현재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대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코르비누스 문고(Bibliotheca Corvinianala)로 불리는 수많은 서적들을 수집했다.

2. 1. 어린 시절 (1443–1457)

마차시는 1443년 2월 23일 콜로주바르(현재 루마니아클루지나포카)에서 후녀디 야노시와 실라지 얼제베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아버지 후녀디 야노시가 부재한 상황에서, 마차시의 교육은 어머니 실라지 얼제베트가 맡았다.[2] 사노크의 그리고리, 야노시 비테즈 등 중앙 유럽의 많은 학자들이 후녀디 가문의 궁정을 방문했는데, 이들은 마차시에게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2]

어린 시절 마차시는 여러 언어를 배웠고 고전 문학, 특히 군사 논문을 읽었다.[2] 안토니오 본피니에 따르면 마차시는 터키어와 그리스어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언어"에 능통했다.[2] 이는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마차시가 헝가리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체코어, 독일어를 구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2]

1451년 8월 7일, 마차시는 세르비아의 데스포트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손녀 첼레의 엘리자베스와 약혼했다. 엘리자베스는 첼레 백작 울리히 2세의 딸이자 러슬로 5세의 친척이었다. 그러나 1455년 엘리자베스가 사망하면서 결혼은 무산되었다.

2. 2. 헝가리 국왕 즉위 (1457–1458)

1457년 라슬로 5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1458년 1월 헝가리 의회가 페스트에서 새로운 왕을 선출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교황 칼릭스토 3세의 교황 사절 추기경 후안 카르바할은 헝가리의 명장 야노시 후녀디의 숭배자였으며, 마차시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1]

마차시를 왕으로 선출하는 것은 장기간의 내전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라슬로 가라이는 가장 먼저 굴복한 귀족이었다. 마차시의 어머니와 삼촌과의 회담에서 그는 자신과 그의 동맹국들이 마차시의 선출을 돕겠다고 약속했고, 미클로시 실라지는 그의 조카가 라슬로 후녀디의 처형에 대한 복수를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또한 마차시가 처형된 그의 형제의 신부였던 팔라티누스의 딸 안나와 결혼하기로 합의했다.[1]

미클로시 실라지는 1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의회에 도착하여 부다에 모인 귀족들을 위협했다. 실라지에 의해 선동된 귀족들은 얼어붙은 도나우 강에 모여 1458년 1월 24일 만장일치로 14세의 마차시를 왕으로 선포했다. 동시에 의회는 그의 삼촌을 섭정으로 선출했다.[1] 이로써 마차시는 귀족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헝가리 왕위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3. 헝가리 통치

마차시 1세는 1458년 왕위에 오른 후, 처음에는 섭정인 삼촌 미하엘 실라지의 지위를 재확인했지만, 곧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며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1458년 3월,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도록 시비우 시민들에게 지시했다.[1]

마차시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얀 이스카라를 제압해야 했다.[2] 이스카라는 폴란드의 카지미르 4세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2] 오스만 제국세르비아 침공으로 인해 마차시는 이스카라와 휴전을 맺어야 했다.[2]

1459년,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에게 왕위를 제안한 남작들의 반란에 직면했지만,[3] 협상을 통해 상황을 수습했다.[3] 1462년,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조약을 맺고 8만 금 플로린에 헝가리 성관을 반환받았다.[4] 같은 해, 얀 이스카라는 마차시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5] 마차시는 이스카라의 항복과 프리드리히 3세와의 평화 조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징수했고,[5] 이스카라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흑군의 기반을 다졌다.[5] 1464년 3월 29일,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성관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6]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1464년, 수석 재상이었던 데네스 세치 대주교를 해임하고 칼로차의 대주교 스테판 바르다이와 야노시 비테즈를 임명했다. 왕립 특별 출석 법원과 개인 출석 법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상급 법원을 만들고, 알베르트 항가치를 초대 헝가리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1465년 데네스 세치가 사망하면서 야노시 비테즈가 새로운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되었다.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였던 니콜라스 유일라키와 덴게레그의 야노스 퐁라츠를 해임하고 지그문트와 야노스 센트죄르지, 베르톨트 엘러바흐 백작으로 교체했다.

1466년, 마차시 1세는 대의회를 소집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준비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포기했다. 슬라보니아의 두 반이었던 니콜라스 유일라키와 에메리크 자폴야를 해임하고 얀 비토베츠와 야노스 투즈로 교체했다. 1467년, 얀 슈베흐라가 지휘하는 체코 용병 부대에 대항하여 상부 헝가리에서 군사 작전을 벌여 그들을 격파하고 슈베흐라와 그의 동료 150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포데브라디의 이르지 및 마차시 코르비누스
미콜라시 알레시의 그림 ''포데브라디의 이르지 및 마차시 코르비누스''


Portrait, 마차시 코르비누스 헝가리 왕, 후냐디, 부조
조반니 달마타 (작품으로 추정), 베네데토 다 마이아노 (이전 귀속)의 르네상스 시대 마차시 코르비누스 헝가리 왕 초상화 (1476)


마차시의 정복 지도
중앙 유럽에서 마차시 코르비누스의 정복


1468년, 마차시는 보헤미아 왕 게오르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고, 체코군을 오스트리아에서 몰아내고 모라바와 실레시아를 침공했다.[4] 1469년 2월, 슈테른베르크의 즈데네크가 이끄는 체코 가톨릭 신자들이 마차시와 연합했고, 4월 올로모우츠에서 교황 사절은 프라하 교구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라는 요구를 제시했다.

1469년 5월, 체코 가톨릭 영지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지만, 보헤미아 자체는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에 충실했다. 1471년 3월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가 사망하고, 5월 보헤미아 제국 의회는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워를 왕으로 선출했다. 교황 사절은 블라디슬라우스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마차시의 보헤미아 왕 지위를 확인했지만, 제국 의회는 마차시의 주장을 거부했다.

1478년, 마차시와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워는 조약을 통해 두 군주 모두 보헤미아 왕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보헤미아 왕관 영토를 분할했다. 1479년, 올로모우츠에서 만나 평화 조약을 비준했다.

마차시는 합스부르크 가의 프리드리히 3세와 갈등을 겪으며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1477년 로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했고,[5] 1477년 12월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 1485년 을 점령했고,[2] 1487년에는 오스트리아 공국의 대공에 즉위했다.[2]

마차시는 만년에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1] 1490년 4월 6일, 에서 사망하여 세케슈페헤르바르 성당에 안치되었다.[1]

3. 1. 초기 통치와 왕권 강화 (1458–1464)

마차시는 1458년 왕위에 오른 후, 처음에는 섭정인 삼촌 미하엘 실라지의 지위를 재확인했지만, 곧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며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458년 3월 3일, 마차시는 나기세벤(현재 루마니아의 시비우) 시민들에게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라와의 갈등을 해결하라고 지시했다.[1]

마차시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첫 번째 남작인 얀 이스카라를 제압해야 했다.[2] 이스카라는 폴란드의 카지미르 4세에게 왕위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2] 마차시의 사령관은 이스카라의 병사들을 격파했지만, 오스만 제국세르비아 침공으로 인해 마차시는 이스카라와 휴전을 맺어야 했다.[2]

1459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황제에게 왕위를 제안한 남작들의 반란에 직면했다.[3] 프리드리히 3세와 반역한 영주들의 연합군은 왕실 군대를 격파했지만, 결국 마차시는 이들과 협상하여 상황을 수습했다.[3]

1462년, 마차시는 프리드리히 3세와 평화 조약을 맺고 8만 금 플로린에 헝가리 성관을 반환받았다.[4] 이 조약으로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를 양자로 삼고, 마차시 사후 헝가리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얻었다.[4] 같은 해, 얀 이스카라는 마차시에게 항복하고 충성을 맹세했다.[5] 마차시는 이스카라의 항복과 프리드리히 3세와의 평화 조약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특별세를 징수했다.[5] 또한, 이스카라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군대를 강화했는데, 이들이 훗날 흑군의 기반이 되었다.[5]

1464년 3월 29일, 마차시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헝가리 성관으로 대관식을 거행하며 헝가리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확립했다.[6]

3. 2. 개혁 정치와 내부 갈등 (1464–1467)

마차시 1세는 왕권 강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1464년, 수석 재상이었던 데네스 세치 대주교를 해임하고 칼로차의 대주교 스테판 바르다이와 야노시 비테즈를 임명했다. 이 두 성직자는 수석 및 비밀 재상의 직함을 가졌으며, 특히 바르다이는 왕립 재무처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다.

같은 시기, 마차시 1세는 왕립 특별 출석 법원과 개인 출석 법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상급 법원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최고 법원은 남작들이 주재하던 전통적인 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사법 행정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마차시 1세는 차나드의 주교였던 알베르트 항가치를 초대 헝가리 대법원장으로 임명했다.

1465년 데네스 세치가 사망하면서 야노시 비테즈가 새로운 에스테르곰 대주교가 되었다. 마차시 1세는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드였던 니콜라스 유일라키와 덴게레그의 야노스 퐁라츠를 해임하고 지그문트와 야노스 센트죄르지, 베르톨트 엘러바흐 백작으로 교체했다. 유일라키는 마초 반 직책을 유지했지만, 왕은 페테르 소콜리를 임명하여 그와 함께 주를 다스리게 했다.

1466년, 마차시 1세는 대의회를 소집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군사 작전을 준비하고, 교황 바오로 2세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마차시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포기했다. 그는 오스만 영토를 침략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도 헝가리를 침략하지 않았는데, 이는 1465년에 헝가리에 온 메흐메트 2세의 사절과 평화 조약을 맺었음을 시사한다.

마차시 1세는 슬라보니아를 방문하여 두 반이었던 니콜라스 유일라키와 에메리크 자폴야를 해임하고 1466년에 얀 비토베츠와 야노스 투즈로 교체했다. 이듬해 초, 그는 얀 슈베흐라가 지휘하고 코스톨라니(현재 슬로바키아의 벨케 코스톨라니)를 점령한 체코 용병 부대에 대항하여 상부 헝가리에서 군사 작전을 벌였다. 마차시 1세는 그들을 격파하고 슈베흐라와 그의 동료 150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3. 3. 보헤미아 왕위 전쟁 (1468–1479)



마차시의 전 매형인 포데브라디의 빅토르는 1468년 초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3] 황제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황제 즉위의 첫 단계인 로마 왕으로 선출될 가능성을 암시했다.[3] 마차시는 1468년 3월 31일 빅토르의 아버지인 보헤미아 왕 게오르기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며, 교황이 파문한 "이단 군주"에 맞서 체코 가톨릭 영주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4] 마차시는 체코군을 오스트리아에서 몰아내고 모라바와 실레시아를 침공했으며, 1468년 5월 트르제비치 포위 공격에서 부상을 입었고, 1469년 2월 변장을 하고 적진을 정찰하다가 흐루딤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자신이 지역 체코 신랑이라고 믿게 하여 풀려났다.[4]

1469년 2월, 슈테른베르크의 즈데네크가 이끄는 체코 가톨릭 신자들은 마차시와 연합했다. 연합군은 빌레모프에서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었고, 체포될까 두려워한 마차시는 전 매형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차시가 온건한 후스파와 성좌 간의 화해를 중재하겠다고 약속하는 휴전을 게오르기에게 설득한 인근 오두막에서 만났다. 4월 올로모우츠에서 열린 다음 만남에서, 교황 사절은 프라하 교구에 가톨릭 대주교를 임명하라는 요구를 제시했는데, 이는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1469년 5월 3일, 체코 가톨릭 영지는 올로모우츠에서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했지만, 그는 대관식을 받지 못했다.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는 곧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지만, 보헤미아 자체는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에 충실했다. 보헤미아 영지는 심지어 폴란드의 카지미르 4세의 장남인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워가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 왕의 뒤를 이을 권리를 인정했다.

마차시는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의 군대를 실레시아에서 몰아냈다. 1469년 11월 2일, 마차시의 군대는 우헤르스키 브로트에서 포위되어 패배했고, 그는 헝가리로 후퇴해야 했다. 포데브라디의 게오르기는 1471년 3월 22일 사망했고, 1471년 5월 27일, 보헤미아 자체의 제국 의회는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워를 왕으로 선출했다. 교황 사절 로렌초 로베렐라는 곧 블라디슬라우스의 선출을 무효화하고 마차시의 보헤미아 왕 지위를 확인했지만, 제국 의회는 마차시의 주장을 거부했다.

마차시와 블라디슬라우스 야기에워의 사절 간의 협상은 가속화되었다. 1478년 3월 28일에 조약 초안이 합의되었고, 1477년 말까지 텍스트는 완성되었다. 조약은 두 군주 모두 보헤미아 왕 칭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블라디슬라우스는 서신에서 마차시를 그렇게 칭하는 것을 생략할 수 있었고, 보헤미아 왕관 영토는 분할되었다. 블라디슬라우스는 보헤미아 본토를, 마차시는 모라바, 실레시아, 루사티아를 통치하기로 하였다. 1479년 7월 21일, 그들은 올로모우츠에서 만나 평화 조약을 엄숙하게 비준했다.

3. 4. 오스트리아 전쟁 (1479–1487)

마차시는 합스부르크 가의 프리드리히 3세와 갈등을 겪으며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1477년 마차시는 로어 오스트리아를 침공하여 빈을 봉쇄했다.[5] 교황 식스토 4세, 베네치아, 나폴리의 페르디난트 1세의 중재로, 1477년 12월 1일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5] 황제는 마차시를 보헤미아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확인하고 100000플로린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5] 코르노이부르크에서 프리드리히 3세는 마차시를 보헤미아 왕으로 임명했고, 마차시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5]

1485년 을 점령했고,[2] 1487년에는 오스트리아 공국의 대공에 즉위했다.[2] 마차시는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 및 보헤미아 사령관을 임명하고, 점령 지역의 방어를 강화했다.

3. 5. 말년 (1487–1490)

마차시는 만년에 통풍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걷지 못하고 가마를 타고 다녔다.[1] 1490년 4월 6일, 마차시는 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세케슈페헤르바르 성당에 안치되었다.[1] 마차시는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왕비 베아트리체와 갈등을 겪었다.[1] 1489년 종려 주일 이후, 그는 더 이상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으며,[1] 누가 그를 독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한 의심은 오래전부터 있었다.[1]

4. 르네상스 문화 진흥

마차시는 자신의 왕국에 르네상스 양식을 전파한 최초의 비(非) 이탈리아 군주였다.[1]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의 결혼은 동시대 이탈리아 예술과 학문의 영향을 강화했고,[2] 헝가리는 그의 통치 하에 이탈리아 외 지역에서 르네상스를 수용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3] 이탈리아 밖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과 작품이 처음으로 나타난 곳은 헝가리였다.[4][5] 이탈리아 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마차시에게 지혜와 힘을 결합한 철인 군주에 대한 플라톤의 사상을 소개했고, 이는 마차시를 매료시켰다.[6] 마차시는 아우렐리오 리포 브란돌리니의 ''공화국과 왕국 비교''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두 형태의 정부를 비교하는 대화가 진행된다.[7][8] 브란돌리니에 따르면, 마차시는 자신의 국가 개념을 요약하면서 군주는 "법의 수장이며 법을 다스린다"라고 말했다.[9]

마차시는 전통 예술 또한 육성했다.[10] 헝가리 서사시와 서정시는 종종 그의 궁정에서 불렸다.[11] 그는 오스만 제국후스파에 맞서 로마 가톨릭교를 옹호하는 자신의 역할을 자랑스러워했다.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을 시작했으며, 교황과 교황 사절 모두를 능가했다. 1460년대에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담은 동전을 발행하여 그녀의 숭배에 대한 특별한 헌신을 보여주었다.

마차시의 제안으로 대주교 요한 비테즈와 주교 야누스 판노니우스는 교황 바오로 2세에게 1465년 5월 29일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에 대학을 설립하도록 승인해 줄 것을 설득했다. ''아카데미아 이스트로폴리타나''는 대주교의 죽음 직후 폐쇄되었다. 마차시는 부다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마차시 1세는 최소 두 개의 주요 건축 사업을 시작했다. 부다비셰그라드의 공사는 대략 1479년에 시작되었다. 부다 왕궁에는 두 개의 새로운 날개와 매달린 정원이 건설되었고, 비셰그라드의 궁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마차시는 이탈리아의 치멘티 카미치아와 달마티아의 조반니 달마타를 이 프로젝트들을 지휘하도록 임명했다.

마차시는 자신의 궁전을 장식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의뢰했다. 조각가 베네데토 다 마야노와 화가 필리피노 리피, 안드레아 만테냐가 그를 위해 일했다. 만테냐가 그린 마차시의 초상화 사본이 남아 있다. 1485년 봄, 마차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마돈나를 그려달라고 의뢰하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 군사 기술자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를 고용하여 남부 국경을 따라 요새를 재건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고딕 건축 양식으로 콜로즈바르, 세게드, 후네도아라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페예레지하자에 있는 성 바울 은수자 수도회를 위해 새로운 수도원을 건설했다.

마차시의 궁정은 수준 높은 음악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교황 예배당의 마스터 바르톨로메오 마라시는 마차시의 예배당 합창단을 자신이 들어본 것 중 최고라고 묘사했다. 조스캥 데 프레와 요하네스 데 스토켐과 같은 작곡가들이 마차시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고, 수많은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그곳을 방문했다. 에스테르곰 대주교 Várdai Pál|팔 바르다이hu의 늦은 언급에 따르면 영향력 있는 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가 1480년대 마차시의 궁정에서 수년간 활동했지만, 바르다이가 그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을 수도 있으며 그를 그곳에 배치하는 문서 증거는 없다.

1480년대 판화, 부다의 왕궁


1480년대 판화, 비셰그라드의 르네상스 양식 여름 별궁


마차시 1세는 1465년경 페라라 출신으로 야누스 판노니우스의 친구인 초대 사서 마르티우스 갈레오티가 도착한 후 체계적인 장서 수집을 시작했다. 1471년에 마르티우스를 계승한 타데오 우골레토와 프란체스코 반디니 사이의 서신 교환은 후자가 새 필사본에 대한 정보를 친구에게 정기적으로 알리면서 왕립 도서관 발전에 기여했다. 마차시 1세는 필사자, 채색가, 제본가를 고용했다. 그의 장서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코르비누스 도서관''(Bibliotheca Corviniana)은 유럽에서 가장 큰 장서 컬렉션 중 하나였다.

마르쿠스 태너에 따르면, 현존하는 국왕의 도서관 장서 216권은 "마차시 1세가 경건한 작품보다 세속적인 책을 선호하는 고전적인 '알파 메일'의 문학적 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크세노폰키루스 대왕의 전기,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책, 그리고 동시대인인 로베르토 발투리오의 군사 논문이 남아 있다. 마차시 1세는 이탈리아 학자 폼포니오 레토가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작품을 보내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독서를 즐겼다.

마차시 1세는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주제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 그의 관대함은 많은 학자들, 특히 이탈리아 출신 학자들이 부다로 정착하도록 장려했다. 안토니오 본피니, 피에트로 란차노, 바르톨로메오 폰치오, 프란체스코 반디니는 마차시의 궁정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이 지식인들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헝가리에 소개했다.

마차시는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별과 행성의 움직임과 조합이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했다. 마르티우스 갈레오티는 그를 "왕이자 점성가"라고 묘사했고, 안토니오 본피니는 마차시가 "별의 조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당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와 마르친 빌리카는 부다에 천문대를 세우고 천구의천체(celestial globe)를 설치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용한 항해에 관한 그의 책을 마차시에게 헌정했다. 국왕은 1468년 빌리카를 그의 고문으로 임명했다. 스콧 E. 헨드릭스에 따르면, "유명한 점성가를 그의 정치 고문으로 임명한 것은 헝가리인들이 통치 기간 동안 직면했던 여러 역경에 직면하여 통제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의 영역 내 정치 엘리트들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불안 감소 메커니즘을 제공했다."

5. 평가

마차시 1세는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과 군사 개혁을 통해 헝가리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또한, 르네상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헝가리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2] 그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맞서 헝가리의 독립을 지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여 서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마차시 1세 사후, 헝가리는 다시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외세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졌다.[2]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으로 왕권은 약화되었고,[2] 마차시 1세가 도입했던 특별세는 폐지되었다.[2] 이로 인해 흑군은 유지될 수 없었고, 급여를 받지 못한 용병들은 시골을 약탈하기 시작했다.[2]

마차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농민들은 무거운 세금 부담을 졌지만,[2] "마차시는 죽었고, 정의는 사라졌다"라는 말은 그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보여준다.[2] 그는 백성들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변장하고 영토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다.[2] 마차시 1세는 크로아티아, 헝가리,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민담의 주제가 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슬로베니아 민속에서는 마차시 왕이 잠자는 왕 중 하나로 여겨지기도 한다.[2]

마차시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3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블라드 3세를 오스만 제국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유폐하기도 했다. 이는 십자군을 포기하기 위한 구실로 블라드 3세를 이용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3] 한편, 마차시 1세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헝가리의 최대 판도를 실현했다.[3]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고 신성 로마 황제 자리까지 노렸으나, 1490년 47세의 나이로 급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3]

6. 문화

마차시는 르네상스 양식을 헝가리에 전파한 최초의 비(非) 이탈리아 군주였다.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의 결혼으로 이탈리아의 예술과 학문의 영향이 더욱 강화되었고,[1] 헝가리는 이탈리아 외 지역에서 르네상스를 수용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다.[2] 마르실리오 피치노는 마차시에게 철인 군주에 대한 플라톤의 사상을 소개하여 그의 관심을 끌었다.[3] 마차시는 아우렐리오 리포 브란돌리니의 ''공화국과 왕국 비교''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여기서 그는 "군주는 법의 수장이며 법을 다스린다"라고 자신의 국가 개념을 요약했다.[4][5]

마차시는 전통 예술도 육성하여, 헝가리 서사시와 서정시가 그의 궁정에서 자주 불렸다.[6] 그는 오스만 제국후스파에 맞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옹호하는 역할을 자랑스러워했으며,[7] 원죄 없는 잉태 교리에 대한 신학 논쟁을 시작하기도 했다.[8] 1460년대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담은 동전을 발행하여 그녀에 대한 특별한 헌신을 보여주었다.[9]

1465년, 마차시의 제안으로 대주교 요한 비테즈와 주교 야누스 판노니우스는 교황 바오로 2세에게 프레스부르크(현재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 대학 설립을 승인받았다.[10] 그러나 ''아카데미아 이스트로폴리타나''는 대주교 사후 곧 폐쇄되었고,[11] 부다에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려던 계획도 실현되지 않았다.[11] 마차시는 부다와 비셰그라드에 주요 건축 사업을 시작하여, 부다 왕궁에는 새로운 날개와 매달린 정원이 건설되었고, 비셰그라드 궁전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치멘티 카미치아와 조반니 달마타가 이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베네데토 다 마야노, 필리피노 리피, 안드레아 만테냐 등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마차시의 궁정을 장식하기 위해 일했다. 1485년, 마차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마돈나를 그려달라고 의뢰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 피오라반티는 남부 국경 요새 재건을 담당했다. 콜로즈바르, 세게드, 후냐드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위한 새로운 수도원이, 페예레지하자에 있는 성 바울 은수자 수도회를 위한 수도원이 고딕 건축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마차시 궁정은 수준 높은 음악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교황 예배당의 마스터 바르톨로메오 마라시는 마차시의 예배당 합창단을 최고로 꼽았다. 조스캥 데 프레, 요하네스 데 스토켐 등 유명 작곡가들이 궁정에서 활동했고, 많은 이탈리아 음악가들이 방문했다.

1465년경부터 마차시는 마르티우스 갈레오티를 초대 사서로 임명하여 체계적인 장서 수집을 시작했다. 1471년, 타데오 우골레토와 프란체스코 반디니의 서신 교환은 왕립 도서관 발전에 기여했다. 필사자, 채색가, 제본가도 고용되었다. 마차시가 사망했을 때, 그의 ''코르비누스 도서관''(Bibliotheca Corviniana)은 유럽 최대 규모의 장서 컬렉션 중 하나였다.

현존하는 216권의 장서는 마차시가 세속적인 책을 선호했음을 보여준다. 크세노폰키루스 대왕의 전기, 쿠르티우스 루푸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책, 로베르토 발투리오의 군사 논문 등이 남아있다. 마차시는 폼포니오 레토에게 실리우스 이탈리쿠스의 제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작품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며 독서를 즐겼음을 드러냈다. 그는 인문주의자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주제로 토론했고, 안토니오 본피니, 피에트로 란차노, 바르톨로메오 폰치오, 프란체스코 반디니 등이 부다에 정착했다. 이들은 신플라톤주의 사상을 헝가리에 소개했다.

마차시는 별과 행성의 움직임이 개인과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마르티우스 갈레오티는 그를 "왕이자 점성가"라고 묘사했고, 안토니오 본피니는 "별의 조언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요하네스 레기오몬타누스와 마르친 빌리카는 부다에 천문대를 세우고 천구의천체를 설치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용한 항해에 관한 책을 마차시에게 헌정했다.[1] 1468년, 빌리카는 마차시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6. 1. 마차시 교회

마차시 교회는 부다 왕궁 언덕에 있는 성모 교회로, 13세기에 헝가리의 벨라 4세가 고딕 건축 양식으로 건축했다. 마차시 1세가 이 교회를 증축하고 이곳에서 두 번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후대에 마차시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역대 헝가리 왕들이 이 교회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16세기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모스크로 사용되었으나, 17세기에 오스만 군이 철수하면서 가톨릭 교회로 복원되었다. 한때 내부 장식이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변경되었지만, 1874년부터 1896년까지 건축가 슈렉 프리제시(Schulek Frigyes|슐레크 프리제시hu)가 개축하여 고딕 양식을 복원했다.

6. 2. 대중문화

마차시 1세는 4X 비디오 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 VI''의 확장팩 ''Gathering Storm''에서 헝가리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한다.[10]

6. 3. 전설

마차시 1세는 신분을 숨기고 종종 국내를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일본미토 고몬과 같은 이미지로, 정의로운 왕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차시 1세 휘하에서 대검을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다뤘다는 호걸 Kinizsi Pál|키니지 팔hu은 왕이 "암행" 중 물레방앗간에서 쉬고 있을 때, 커다란 바위를 쟁반 대신 사용하여 물을 대접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신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7. 가족 관계

마차시 1세는 여러 번 결혼했지만, 왕비들과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얻지 못했다.


  • 첫 번째 부인: 첼레의 엘리자베트 (1455년 약혼, 같은 해 사망)[2]
  • 두 번째 부인: 포데브라디의 카타르지나 (1461년 결혼, 1464년 사망)
  • 세 번째 부인: 나폴리의 베아트리체 (1476년 결혼)


사생아로는 코르빈 야노시 (1473년 출생, 어머니는 바르바라 에델푀크)가 있었다. 마차시는 코르빈 야노시를 왕위 계승자로 만들려고 했으나, 왕비 베아트리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마차시 1세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첫 번째 부인첼레의 엘리자베트1455년 약혼, 같은 해 사망[2]
두 번째 부인포데브라디의 카타르지나1461년 결혼, 1464년 출산 중 사망
세 번째 부인나폴리의 베아트리체1476년 결혼, 마차시 사후 나폴리로 돌아감
사생아 (아들)코르빈 야노시1473년 출생, 어머니는 바르바라 에델푀크, 1504년 사망


참조

[1] 웹사이트 Stanislav Klíma: Povesti zo Slovenska (Kráľ Matej a bača) – elektronická knižnica https://zlatyfond.sm[...]
[2] 서적 Mátyás király https://mek.oszk.hu/[...] Magyar Helikon
[3] 문서 Kisfaludy
[4] 문서 Kisfaludy
[5] 문서 Kisfaludy
[6] 서적 The Causes of War: Volume III: 1400 CE to 1650 CE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7] 서적 Useful Enemies: Islam and The Ottoman Empire in Western Political Thought, 1450-1750 Oxford University Press
[8] 서적 Irodalomtörténeti Közlemények, 102 (5-6) http://real-j.mtak.h[...] MTA Irodalomtudományi Intézet (Institute for Literary Studies of Hungarian Academy of Sciences)
[9] Encyclopedia Matthias I https://www.britanni[...] Encyclopedia Britannica
[10] 웹사이트 'Civilization® VI – the Official Site | News | Civilization VI: Gathering Storm – Matthias Corvinus Leads Hungary' https://civilization[...]
[11] 웹사이트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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